전주시는 동학농민혁명의 중요한 무대였으며, 1894년 동학농민군이 전주성을 점령한 곳으로
역사적 의미를 지닌다. 농민군은 이곳에서 정부와 협상을 통해 전주 화약을 체결했고, 이후 집강소를 설치하여
자치적인 개혁 활동을 펼쳤다. 전주는 동학농민혁명의 승리와 개혁 요구가 실제로 이루어진 상징적 장소로,
그 과정에서 민중 저항과 사회 개혁의 중심지가 되었다.
이 사건은 민중의 요구가 정치적으로 인정받았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의를 가진다.
TIP 전주화약은 폐정개혁안을 받아들이고 집강소 설치를 허락한 조정과 동학농민군이 맺은 협약이다.
동학농민혁명의 정의와 의의
1894년 고부농민봉기에서 전주화약에 이르기까지의 봉건체제의 개혁을 1차로 봉기하고,
같은 해 9월 일제의 침략으로부터 국권을 수호하고자 2차로 봉기하여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한 농민중심의 혁명이다.
1892년 조선말의 조정은 고종의 무능과 왕비 민씨의 권력의 횡포, 국가 예산 낭비 그리고 민씨들의 횡포로 인해 부패가 만연했고 이러한 무능으로 외세의 침탈에 제대로 대응도 하지 못하였다. 그로 인해 각종 사회혼란으로 국민들은 매우 살기 힘든 시기였다. 특히 왕비 민씨(민비)의 가문인 민씨들은 민비의 관력을 이용해 공직을 돈을 받고 파는 매관매직에 열을 올렸다. 관직을 돈을 주고 산 관리들은 그 돈을 충당하기 위해 법에도 없는 각종 세금을 신설하여 백성들을 더욱 고단하게 만들었다.
그런 어려운 시대에 경북 경주의 몰락한 양반 출신인 최제영은 백성들에게 한줄기 희망을 주는 “동학”이라는 교리를 창시하였다. 동학의 사상은 모든 사람은 귀천이 없어 신분제도를 타파하고 남녀를 차별하지 말라는 교리를 내세우며 이런 부조리한 세상을 개혁하자는 내용이었다. 이러한 교리의 동학사상은 피지배 계층인 백성들에게 좋은 호응을 얻어 고단한 백성들에게 서서히 퍼지고 있었다.
조선말은 각종 부패로 전국에서 민란이 번지고 있었다. 특히 정읍의 고부군(현재 정읍시 이평면)에서는 군수 조병갑의 악랄한 횡포로 인해 그동안 쌓여 있던 농민들의 불만과 동학의 사상이 합쳐져 일반 민란이 아닌 동학사항을 견지한 새로운 세상을 만들자는 대형 농민 운동으로 번지게 되었다. 동학군은 전라도를 관장하는 전라감영으로 진군하고 머물면서 재물만 취하고 끝나는 다른 민란과 달리 부조리한 제도와 신분제 등 개혁을 위해 조정과 타협하여 고치려 하는 등 사회를 개혁하고자 하고 더 나아가서는 조선을 침략한 일본과 맞서 싸운 의병의 역할까지 하여 그 의미가 더 크다 할 수 있다.
동학농민혁명으로 인해 전라도 각 지역에 집강소를 설치하여 치안과 행정을 시민들이 직접 통치를 하였고 행정의 목표로 노비를 없애고, 천민의 대우를 개선하게 하고 과부의 재혼을 허락하게 하는 남녀평등과 토지를 균등하게 나누어 경작하게 하는 등 상당히 민주적인 주장을 한 그 당시로서는 파격적이며 혁신적인 민주화 운동이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전문 군사 훈련을 받지 못하고 변변한 무기조차 없던 동학군은 조선의 관군과 일본군의 공격을 이기지 못하고 아쉽게 패한 아쉬운 마무리를 맺는다. 일본은 지금도 일본이 조선을 통치하면서 신분제를 없애고 낡은 조선의 제도를 개혁하여 주었다고 주장하지만 사실 일본이 침략하기 전부터 동학농민혁명에서도 볼 수 있듯이 국제적인 시대 흐름에 맞춰 아주 세련된 민주사상 등 개혁의 의지를 조선 스스로 진행되고 있었다는 걸 보여주고 있어 일본의 주장은 조선 침략을 정당화하기 위한 터무니없는 주장이라고 볼 수 있다.
전주화약(全州和約)이란?
1894년 동학농민군은 탐관오리의 수탈과 부정부패에 맞서 봉기했으며, 조선 남부 지역에서 큰 성과를 거두고 전주성을 점령하였다. 위기감을 느낀 조선 정부는 청나라에 원병을 요청했고, 이를 빌미로 일본군도 개입하게 되면서 조선 내 상황이 복잡해졌다. 농민군은 일본군의 개입을 원치 않았기 때문에 정부와의 협상을 선택했고, 그 결과 전주 화약이 체결되었다. 전주 화약(全州和約)은 1894년 동학농민혁명 중 농민군과 조선 정부 사이에 맺어진 휴전 협정으로, 동학농민혁명의 중요한 전환점으로 간주된다.
화약의 결과로 농민군은 해산했고, 정부는 부정부패 척결과 개혁을 약속했다. 또한, 농민들은 일부 지역에서 집강소를 통해 자치를 실현했다. 전주 화약은 동학농민혁명이 군사적 충돌에서 정치적 협상으로 나아간 중요한 사건이며, 이후 조선의 정치 및 사회 개혁 운동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전주 화약은 농민군과 정부 사이의 갈등을 일시적으로 해결했지만, 이후 일본의 개입 명분으로 이어져 본격적인 일본의 간섭으로 이어졌다.
- 전주화약
폐정개혁안을 받아들이고 집강소 설치를 허락한
조정과 동학농민군이 맺은 협약 - 집강소
개혁 사무를 담당했던
농민의 자치 기구(황토현 기념관)
전주시 동학혁명의 발자취
1차 동학농민군의 봉기 후 조선으로 들어온 일본군은 돌아가지 않고 조선에 남아 조선의 궁궐인 경복궁을 6월 21일 침범한다. 이러한 일본군을 조선에서 몰아내고자 동학군은 다시 봉기를 하게 된다. 동학군은 궁궐을 침범한 일본을 무찌르자는 척왜를 외치며 전라북도 삼례, 충청도 지역에서 2차 봉기를 한다. 전라도 지역의 동학군을 남접이라 하였으며 충청도 지역의 동학군을 북접이라 하였다. 2차 봉기에는 남접과 북접이 논산으로 모여 일본군을 몰아내기 위해 서울로 직접 진격을 하고자 한다.
이렇게 북진을 하다 11월 9일 충남 공주 우금치에서 조선의 관군과 일본군의 연합군과 1주일 동안 전투를 벌여 약 2만 명 중 500명 정도만 살아남을 정도로 대패를 하게 되어 사실상 신분제 폐지, 남녀평등을 외친 조선의 최대의 시민혁명인 동학농민혁명은 아쉽게 마무리를 하게 된다. 동학군의 패배로 인해 저항이 사라진 조선은 이듬해인 1895년 왕비 민씨를 시해하는 ‘을미사변’을 일으켰지만 조선은 큰 저항을 하지 못하고 1910년 힘없이 일본에 넘어가게 된다. 이러한 시대를 앞서나간 동학운동의 발자취는 전주에 많이 남아 있다. 수많은 농민군들의 죽음과 희생으로 오늘날 대한민국이라는 자랑스러운 민주국가를 건설하게 되었다. 전주 어느 장소에서 어떠한 희생과 활약이 있었는지 역사유적지를 보면서 동학농민혁명의 발자취를 느껴보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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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덕진공원 김개남 기념비
김개남(金開男, 1853-1895)은 동학농민군의 핵심 지도자로 정읍 출신이다. 동학의 태인 대접주로 전봉준 다음으로 가는 남접의 실력자였다. 동학농민혁명 때 남원을 점령하였고, 청과 일본이 개입하자 남원부사를 처단하고 남원에서 동학군정을 실시했다. 그러나 우금치와 금구 등에서 관군과 일본군에 패배하였고 태인에서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전주시 덕진구 덕진동1가 1314-46
덕진공원 내에 있는 <김개남장군추모비>는 1993년 5월 30일 ‘김개남 장군을 추모하는 사람들’이 김개남을 기억하고 그의 뜻을 계승하기 위해 조성한 기념비이다. 기단부에는 ‘김개남장군추모비’라고 음각되어 있고, 상단에는 ‘개남아 개남아 김개남아’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 이 글귀는 당시 ‘새야 새야 파랑새야’와 함께 불렸던 ‘개남아 개남아 김개남아, 수천군사 어디 두고 짚둥우리가 웬 말이냐’라는 노래의 한 구절이다. -
2 덕진공원 손화중 기념비
동학농민군의 핵심 지도자 중 한명인 손화중(孫華仲, 1861~1895)은 정읍 출신의 대접주였다. 동학농민혁명 당시 동학농민군을 이끌고 관군과 일본군에 대항했다. 나주성 전투에서 패해 피신했다가 1895년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전주 덕진공원 내에 있는 <손화중장군 추모비>는 1998년 11월 7일 ‘손화중장군을 추모하는 사람들’이라는 단체에서 조성했다. 기념비 상단에는 ‘사람이 한울이다’이라는 글이, 하단에는 ‘보국안민 척왜척양’이 쓰여 있다.
전주시 덕진구 덕진동1가 1314-46 -
3 덕진공원 전봉준 동상
전주 덕진공원 내에 있는 <전봉준 선생상>은 동학농민군 최고지도자였던 전봉준의 ‘애국단심’을 기리기 위해 세운 청동상이다. 1981년 10월 한국청년회의소 제30차 전국대의원대회를 기념하여 전주청년회의소와 풍남청년회의소에서 동상을 건립했다. 전봉준 동상은 전주지역에서 최초로 세워진 것으로 전두환 정권 수립 후 황토현 전적지 정화사업 등을 벌이던 분위기 속에서 세워졌다.
전주시 덕진구 덕진동1가 1314-46 -
4 한옥마을 동학혁명기념관
동학혁명기념관은 천도교에서 동학농민혁명 1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국고보조금과 성금을 모아 건립한 기념관이다. 1994년 말에 착공하여 1995년 5월 31일 준공하였으며, 동학과 천도교 관련 자료를 전시함으로써 ‘동학의 역사와 정신, 그리고 그 꿈과 비전을 현창하기 위한’ 목적을 가지고 개관하였다.
전주시 완산구 풍남동 3가 76-2
기념관은 지하 1층과 지상 3층의 규모로 지하에는 사무실과 천도교 사무처가 있고, 1층은 회의실, 2층은 전시실, 3층은 동학문화예술센터가 있다. 주요 전시품은 사진, 공문서, 책 영인본, 책, 동상, 병풍 등이 있다. -
5 삼천 동학농민군 전투지
혁명군은 황룡촌 전투에 승리하고, 조선 정부에서 파견한 홍계훈의 경군보다 빠르게 전주로 북상하게 된다. 2~3만의 동학농민연합군은 26일에 전주 삼천에 진격하여 하룻밤을 머물며 전라감사 김문현과 심리전을 벌이며 대치한다.
전주시 완산구 효자동1가 410-23 일대(우림교 주변) -
6 완산칠봉 동학농민군 전투지
동학농민군이 전주성을 점령하자 홍계훈은 전주성을 포위하기 위해 완산에 진을 치고 남산, 건지산, 기린봉, 오목대, 황학대, 전주성 성문 주변에 군대를 배치하였다. 이에 동학농민군은 4월 28, 29일, 5월 1일에 진압군을 공격하였지만 별다른 전과를 올리지 못했고 5월 3일, 농민군 수천 명이 북문을 열고 우회해 용머리재를 공격했으나 오히려 진압군에 의해 큰 피해를 입고 전주성으로 후퇴하였다.
전주시 완산구 평화동1가 산43 -
7 풍남문 동학농민군 입성지
황룡강 인근 전투 승리 후 동학농민군은 대포 2문과 양총 100여 정을 노획해 경군 300여 명을 사살 후 전주읍성을 공격하였다. 당시 전라감사 김문현은 동학농민군의 공격을 막기 위해 4대문에 이속을 배치하였고 민가 수천 채를 방화했다. 하지만 동학농민군은 장사꾼들 사이에 끼어 서문으로 잠입해 전주읍성에 입성하였고 고부봉기 4개월여 만에 호남 수부를 점령하였다.
전주시 완산구 풍남문3길 1 -
8 황학대
황학대는 현재 신흥중학교가 있는 자리로 농민군이 전주성을 점령하고 있는 동안 농민군과 외곽을 포위해 있던 관군 사이에 치열한 접전이 있었던 곳이다. 농민군이 전주성을 점령한 다음날 전주성에 도착한 초토사 홍계훈은 전주성 남쪽 완산 일대와 서문 및 북문과 인접한 이곳 황학대 및 유연대에 진을 치고 전주성 안의 농민군을 공격하였다. 4월 28일 홍계훈이 성안을 공격하며 치열한 공방전이 있었으며 황학대와 유연대에서는 5월 3일 대규모의 전투가 벌어졌다.
전주시 완산구 풍남동 3가 76-2
이 전투로 관군과 농민군의 피해는 컸으며 특히 농민군 지도자 김순명(金順明)과 14세의 장사 이복용(李福用)이 전사하였고 전봉준도 왼쪽 다리에 부상을 입었다. 농민군 500여 명이 희생된 이 전투는 농민군의 사기에 커다란 영향을 미쳐 이후 관군에 대한 농민군의 공세는 수그러들었으며 농민군 내부에 혼란을 가져왔다. -
9 동학농민혁명 녹두관
전주시는 동학농민혁명을 기념하고 그 정신을 계승하기 위해 완산공원과 완산도서관을 포함한 동완산동 일원에 무명 동학농민군 추모 공간인 ‘녹두관’을 완공했다. 전시실과 추모실, 옥상 전망대, 하늘 통로로 구성된 ‘녹두관’은 동학농민혁명의 의미와 역사를 면면히 관람할 수 있는 공간이면서, 무명 동학농민군 지도자의 유골을 안장하고 추모하는 공간이다.
전주시 완산구 동완산동 산 124-9
‘녹두관’은 125년 전 선조들이 간절히 바라던 꿈을 가까이서 느껴볼 수 있도록 꾸며졌다. 전시실은 전주의 동학혁명 자료 및 무명 동학농민군 지도자 유골을 중심으로 구성된다. 또, 동학농민혁명 관련 전시와 영상물을 통해 19세기 말 탄압의 시대상부터 봉기 전개 과정 등 동학농민혁명의 주요 연대기를 한눈에 살펴볼 수 있다.